친구들과 단체 카카오톡 채팅방에서 이야기를 하던 중, 한 친구가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했다. “나는 원래 혐오의 감정이 없었는데, 특정 사건들이 반복되면서 혐오의 감정이 생성되었어.” 그 말을 듣고 한 가지 의문점이 생겼다. “과연 혐오는 생성되는 것인가?, 아니면 증폭되는 것인가?” 고민 끝에 나는 그러한 의문에 대한 답으로 “혐오는 생성되는 것이 아닌 증폭되는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성은 ‘이전에 없었던 어떤 사물이나 성질의 새로운 출현’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즉 “특정 사건이 혐오를 생성시켰다.”라는 표현은 이전에는 혐오의 감정이 없었지만 특정 사건들이 혐오라는 감정을 끌어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달리 증폭은 ‘사물의 범위가 늘어나 커짐’이라는 뜻을 지닌다. 즉 “특정사건이 혐오를 증폭시켰다”라는 표현은 이전에 자신도 모르게 자기도 있었던 혐오가 특성사건을 계기로 커진 것이다.
혐오가 증폭이 되면 증오가 된다. 물론 혐오도 좋은 감정이 아니기는 하지만, 단순한 혐오는 대상이 자신의 눈앞에 없으면 잠잠해진다. 심각한 악취가 혐오감을 불러오기는 하지만 상황을 벗어나면 그 감정은 점차 사라진다. 그러나 증오는 다르다. 증오는 대상이 눈앞에 존재하지 않더라도 끝까지 찾아내서 처리하려하고, 그 대상이 사라지더라도 억지로라도 상황을 만들고 지목을 해서 증오를 지속하려고 노력한다.
이를 통해 분석하면 한국 사회에 널리 퍼져있는 혐오의 모습은, 혐오를 넘어 증오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한국 사회는 ‘이념혐오’, ‘지역혐오’, ‘세대혐오’, ‘남녀혐오’, ‘소수자혐오’ 등으로 병들고 있다. 또한 이러한 혐오가 다시 혐오를 야기하고 그 혐오가 새로운 혐오를 낳는 최악의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초기에는 익명성을 기반으로 하는 온라인 공간에서 흔히 볼 수 있었으나, 최근에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운영하는 SNS나 현실 사회의 여러 시위나 집회까지의 오프라인 공간까지 확산되고 있다.
증오의 양식은 다음과 같다. 특정 계층에 속하거나 정체성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 저지른 일부 사건을 확대해서 모든 계층 및 정체성을 지닌 사람이 지닌 모습으로 생각하는 것을 현대 사회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다. 또한 특정 행위를 통해 한 개인을 혐오한 후, 그 행위에 대한 반성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개인의 다른 흠을 찾아 비난하는 모습도 빈번하게 나타난다. 공직자들을 무분별하게 비난하거나 범죄자는 죄의 경중을 따지지 않고 격리 및 사형을 시켜야 한다는 논리 또한 이러한 관점의 연장선이다.
실제로 2020년 현재 증오의 성격을 지닌 혐오는 우리 사회에서 하나의 문화가 되었다. 특정 계층 및 정체성을 경멸하는 혐오 발언을 가벼운 농담으로 취급하는 정도로 까지 발생했다. 또한 개독(기독교에 대한 혐오표현), 개불(불교에 대한 혐오표현), 한남충(한국 남자에 대한 혐오표현), 꼴페미(페미니즘에 대한 혐오표현), 맘충(아이를 가진 엄마에 대한 혐오표현), 틀딱층(노인에 대한 혐오표현), 잼민이(초등학생에 대한 혐오표현), 휴거(휴먼시아거지 : 임대아파트 주민에 대한 혐오표현), 빌거(빌라거지 : 빌라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혐오표현) 등 모든 계층, 모든 연령, 모든 사람들이 혐오의 대상이 되고 있다.
심지어 이러한 혐오 여론의 위험성을 지적하고 자성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도 씹선비(선비와 같이 올바른 이야기만 하는 사람에 대한 혐오표현)이나 진지충(진지한 말만 하는 사람에 대한 혐오표현)이라고 말하며 비난한다. 정상적인 모습이라고 볼 수 없다. 현재 코로나19의 확산 및 여러 사회문제의 영향으로 현재의 혐오의 양상은 하루하루 새로운 극단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그 결과 상호존중은 현실에서는 찾지 힘들고 도덕 교과서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표현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아무리 혐오가 빈번해지고 흔해진 사회라고 할지라도 이런 시류에 아무런 비판의식이 없이 편승해서는 안 된다. 또한 혐오를 혐오로 받아치는 것 또한 새로운 혐오를 만드는 것이기에 지양해야 한다. 그 누구도 남을 함부로 혐오 및 증오할 권리는 없고 마찬가지로 어느 누구도 남에게 혐오 및 증오를 당할 이유는 없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 혐오의 악순환은 이제 끊어져야 한다.
혐오의 해결은 한 개인 혹은 한 집단만의 노력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의 실천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다. 글자 ‘나’에서 ‘ㅏ’를 거꾸로 뒤집으면 ‘너’가 된다. 그동안 개인주의가 심화된 한국 사회는 '나'만을 강조해 ‘너’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모습은 모여서 남을 인정하지 않는 증오로까지 뻗어버린 혐오의 모습이 되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공동체는 스스로만이 중심이 아닌 같이 살아가는 구성원이 모두 존중받아야 발전할 수 있다. ‘이념갈등’, ‘남녀갈등’, ‘지역갈등’, ‘세대갈등’ 등과 같은 갈등은 '나'만 생각하기에 발생한다. 이런 모습들이 결국 대한민국을 병들게 만들었다. 서로에 대한 이해 및 배려가 갈등해결의 실마리가 될 수 있다.
사실 쉽게 뱉은 말과 달리 이를 실행하는 것은 쉬운 말이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해야만 한다. 우리 사회가 '나'만 생각해서 ‘너’를 인정하지 않는 '혐오사회'에서 벗어나, ‘나’의 가치를 존중하는 것처럼 '너'와 '우리'까지 인정하는 성숙한 모습을 보일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러면 ‘혐오사회’를 극복하고 '화합사회'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