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는 오랫동안 ‘착한 학생’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학생을 평가하고 길러 왔다. 여기서 착한 학생이란 교사의 지시를 잘 따르고, 수업 시간에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며, 조용히 앉아 지식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학생을 의미한다. 

 

착한 학생은 학교가 기대하는 이상적인 학생상으로 여겨졌고, 많은 학생이 이 프레임에 맞추기 위해 노력했다. 교사 입장에서도 이와 같은 학생이 다루기 편하고 효율적이라는 장점이 있었다. 하지만 이 프레임이 가진 한계는 명백하다. 순응적이고 수동적인 태도를 강조할수록 학생들은 주체적 사고와 창의성, 그리고 지적 탐구 능력을 점점 잃어버리게 된다.

 

최근 들어 교육 현장에서 ‘불편한 학생’이라는 새로운 프레임을 마주하고 있다. 불편한 학생이라는 표현이 처음 들었을 때는 적대적이고 반항적인 학생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불편한 학생’이란 단순히 반항적 태도를 보이는 학생이 아니라, 지식과 학문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며 교사와 학교의 기존 방식을 고민하게 만드는 학생이다.

 

즉, 불편한 학생의 핵심은 적대성이 아니라 탐구성과 지적 긴장에 있다. 이런 불편한 학생들은 종종 수업 중 “이걸 왜 배워야 하죠?”, “이 이론은 정말 현실적으로 적용되나요?”와 같은 본질적 질문을 던지며 교사를 긴장시키고 때로는 수업의 흐름을 깨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질문이 익숙한 교사들에게는 매우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다. 이미 잘 준비된 수업 계획을 흔들어 놓을 뿐 아니라, 교사 개인의 교육적 신념과 방식에도 도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학교와 교육의 진정한 발전이 이루어진다. 질문과 의문은 기존의 지식과 수업 방식을 근본적으로 다시 고민하고, 더 나은 방식과 방향을 모색하게 만드는 강력한 원동력이다. 돌이켜보면, 역사적으로 사회를 변화시키고 발전시킨 사람들은 모두 한때는 기존의 사회질서와 체제 안에서 ‘불편한 존재’로 여겨졌다.

 

갈릴레오의 질문은 당시 사회에 불편했으며, 마틴 루터의 개혁적 목소리 역시 기존 사회에 극도로 불편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질문과 도전이 있었기에 사회는 발전할 수 있었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불편한 학생’의 존재는 교사와 학교에게 더 나은 수업과 교육 환경을 만들도록 자극하고, 궁극적으로는 더 풍요로운 교육적 토양을 형성한다.

 

이제 학교는 더 이상 ‘착한 학생’이라는 낡고 편협한 프레임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학생들을 수동적이고 획일적으로 길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가진 의문과 비판적 사고, 지적 호기심을 최대한 존중하고 키워주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교사는 학생들의 질문을 수업 진행의 방해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수업의 질을 높이고, 교육의 본질에 더욱 가깝게 다가가기 위한 기회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학교가 '착한 학생'의 안락한 프레임을 벗어나 불편한 질문을 환영하고, 탐구심 있는 학생들을 격려하는 곳이 될 때, 비로소 교육은 창의성과 자율성이 살아 숨 쉬는 진정한 미래의 학교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불편한 학생, 그들이 바로 학교와 교육의 진정한 미래를 이끌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