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건국신화라하면 고조선 건국의 단군신화, 고구려 건국의 주몽신화를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후삼국시대에도 신화가 존재했다. 하나의 밈이 되어버린 궁예의 "관심법"은 알고 있어도 그 관심법이 미륵사상에 기반한 신화라는 사실을 알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약 수백년을 이어온 신라의 전통성을 깨기 위해서 후백제, 후고구려, 고려는 신화를 차용했다. 다만 후삼국시대의 사람은 과거 단군신화 및 주몽신화를 믿던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의식적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들은 신화를 통해 전통성도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그와 함께 현실성 또한 강조했다. 고려는 민중들의 그 의식의 성장에 맞춰 신화를 창조해 계승되었지만 후백제와 후고구려는 그렇지 못했다.
후백제의 권훤은 백제를 계승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무왕의 탄생설화를 차용했다. 그러며 미천한 존재이지만 비범한 능력을 지녔다는, 전형적인 신화의 형식을 차용했다. 다만 현실의 인물인 권훤이 모든 역경의 주인공이 되면서 신화의 모습이 역사와 뒤섰이며 이도저도 아닌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또한 현실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신화에만 전적으로 의존했다.
후고구려의 궁예는 출생에서 신라의 후손이나 비정상적은 성장을 했다는 것을 강조했다. 즉 신라의 혈통이라는 고귀한 신분을 강조하면서도 역경을 해처나오는 영웅적 모습도 같이 보여줬다. 그러며 당대 유행하던 민중적 기대인 미륵신앙을 사용해 고대 건국신화의 양식을 철저하게 계승했다. 즉 궁예의 역사적 행적을 강조하는 것이 아닌 신이한 능력을 강조해 고대 건국설화의 영웅의 모습을 궁예를 통해 투영했다.
견훤의 신화는 현실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당대 민중을 고려해서 역사적 이야기를 투영했지만, 신화와의 경계에서 중심을 잡지 못해 널리 전승되지 못했다. 궁예의 신화 또한 당대 민중들을 고려해 그 당시 널리 믿어졌던 미륵사상를 기반으로 고대 건국소설의 양식을 차용해서 만들었지만, 현실성을 충족하지 못해 도태되었다. 고려의 건국신화는 이와 달랐다.
고려는 왕건만 강조한 것이 아닌 왕건의 6대조부터 내려온 이야기를 신화로 만들었다. 그러면 처음에는 신화적 요소가 강했지만 왕건으로 내려오며 역사적 내용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신화를 창조했다. 즉 당대 사람들이 원하던 전통성은 신화의 성격이 강한 6대조를 통해, 현실적인 이야기는 왕건의 실제 역사를 통해 보여줬다. 또한 당대 유행하던 불교와 풍수지리같은 실제 민중 삶속에 있는 요소도 신화에 반영되었다.
즉 고려의 신화는 산만했던 후백제의 건국신화, 구시대적인 후고구려의 건국신화와 달리 역사시대 방식에 적합한 방식으로 신화가 발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내용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국문학사와 한국사는 서로 독립된 영역이 아닌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발달한다. 영원할 줄만 알았던 신라가 흔들리며 한반도의 민중들은 의지할 곳이 필요했다. 후삼국시대의 국가인 후백제, 후고구려, 고려는 민중의 기대에 충족시키며 정통성을 얻기 위해 신화를 차용했다.
권훤과 궁예와 달리 왕건은 시대상(중세적보편주의)에 기반한 신화를 만들었고 백성의 지지를 등에 입어 후삼국시대의 최종 승자가 되었다. 당대 사회의 요구가 신화의 내용을 한층 더 발전시킨 결과를 만든 것이다.
고대건국신화가 중세적보편주의를 적용해서 발전된 점은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도 시사점을 준다. 중세와 현대 모두 각 시대마다 원했던 바람과 이념이 있다. 이를 신화로 잘 녹여낸다면 중세건국신화와 같은 영향력을 오늘날에도 끼칠 수 있을 것이다.
교육적으로도 신화를 대할 때 단순 과거의 신성한 이야기가 아닌 시대변화와 요구에 맞춰 연속성을 지니는 생물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면 학습자들이 신화를 더 쉽고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