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고요한 바다에 울려퍼진 아름다운 위로의 노래”
피아니스트 윤유진 교수 독주회

피아니스트 윤유진의 특별한 독주회가 열렸다. 


코로나와 강추위가 우리의 삶을 긴장하게 하고 있던 지난 지난 12월 15일 금호아트홀 연세에서 베토벤의 탄생 250주년을 기념해 그의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 세 곡을 연주했다. 베토벤은 총 32개의 피아노 소나타를 썼는데 이 중 마지막 세 개의 소나타는 그의 후기 음악의 실험적인 면모들을 다양하게 보여주고 있는 대표적인 곡들이다. 그의 현악 4중주와 더불어 피아노소나타는 베토벤의 주요한 음악적 변화들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쟝르인데, 특별히 이 세 곡에서는 악장의 전형적인 템포 변화, 다른 음악적 양식의 차용(변주곡과 푸가), 긴 트릴의 사용, 특정 화성(감 7 화음)의 잦은 사용, 극단적인 셈여림의 변화, 긴 프레이징의 사용 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연주는 8시를 조금 넘어 시작되었는데 청중은 철저한 거리두기로 인해 70여명만 좌석에 앉을 수 있었고 모두 마스크를 쓴채 무대 왼쪽 문에서 연주자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평상시의 연주회 분위기에서 느낄 수 있는 가벼운 담소나 미소는 찾아볼 수 없었고 무겁게 가라앉아있는 공기를 느끼며 온몸의 감각은 청각쪽으로 쏠린 채 베토벤과 만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 날의 분위기는 베토벤의 후기 소나타와 잘 어울리는 촉매제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첫번째 곡인 30번(Op. 109 in E major)는 윤유진의 음악적 유연성과 흐름(flow), 호흡, 그리고 끌고나가는 힘이 돋보인 연주였다. 1악장 시작부분의 짧은 서정적 멜로디와 이어지는감 7 화성의 극적인 인터셉트는 템포의 완급조절이 자연스러웠고 프레이징의 처리에 있어서는 나무랄 바 없는 유연성을 보여주었다. 특히 프레이징을 처리하는데 있어서 호흡과 셈여림은 매우 중요한데 이 부분 역시 무난히 처리했다. 2악장에서 보여준 구조적 단단함은 단호한 리듬감과 보이싱(각 성부가 잘 나타나는 것) 테크닉과 방향성을 확실히 가지고 있어서 ‘깔끔함’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연주였다. 3악장은 주제가 3번 반복되는 변주곡형식의 곡으로 멜로디가 마치 인생을 관조하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는데 각각 다른 음악적 접근으로 곡의 완성도를 높였다. 가장 어려운 악장으로 생각되는 3악장에서 윤유진이 탁월했던 점은 바로 마지막 부분에 해당하는 왼손의 긴 트릴속에서 감 7 화성으로 시작되는 오른손의 격정적인 페시지의 연주였다. 어떤 절망적 상황 혹은 마지막을 예감하면서도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는 강력한 의지를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두번째 곡은 31번(Op. 110 in A-flat major)는 첫번째 곡보다는 보다 여유롭고 안정적으로 연주했다. 후기 소나타의 특징중에 하나인 느린템포의 1악장, 빠른 템포의 2악장, 그리고 푸가 양식을 접목시킨 느린 템포로 시작하는 3악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템포 변화는 빈번하고 마지막은 빠른 템포의 화려한 피날레로 이루어져 있다. 윤유진은 이 곡에서 전악장을 컨트롤하는 능력이 돋보였다. 특히 2악장은 많은 피아니스트들이 두려워하는데 그 이유가 바로 왼손과 오른손이 비교적 빠른 템포에서 연속적으로 교차하는 순간이 자주 있기에 실수에 대한 공포는 물론이고 그것으로 인해 밸런스가 무너지고 연주가 망가지는 경우가 많아서 그러한데 이런 부분들이 매끄럽게 처리되었다. 3악장에는 마치 베토벤의 일생을 보여주는 듯한 구성이다. 느리고 암울하며 슬픈 멜로디와 화성으로 이루어지다가 푸가를 통해서 점점 승리의 건물이 완성되는 듯한 구조를 두 번 보여주고 있다. 이 화려한 마지막 A-flat의 아르페지오 페시지를 거쳐 동일 코드로 곡이 웅장하게 끝낼때 까지 컨트롤하는 것이 대단히 도전적 과제인데 이것을 윤유진은 적절히 효과적으로 잘 해냈다. 

세번째 곡은 32번(Op. 111 in C minor)는 2악장 구조인데 특이하게 1악장은 C minor, 2악장은 C major으로 구성되어 있다. 감 7 화성을 가장 효율적이고 다양하게 다루고 있는 1악장에서 윤유진의 피아니즘은 뛰어났다. 음악적으로 몰아가는 대단함 힘, 양손의 고른 테크닉, 그리고 셈여림과 아티큘레이션을 표현해내는 음악적 카리스마는 2미터 75센티의 스타인웨이를 통해 효과적으로 분출되었다. 대망의 2악장은 아마 베토벤 소나타 전체를 통틀어 가장 어려운 악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변주곡 양식을 도입해 구조적으로 정교하게 작곡되어 있고 음악적으로도 변화무쌍함을 보여주고 있다. 악장의 조성변화에서도 읽을 수 있듯이 2악장은 가장 완전한 조성인 C major로 끝난다. 극단적인 셈여림, 특히 피아니시모는 사실상 피아니시시모에 가깝다. 그렇게 연주할 때 효과는 더 크다. 윤유진은 무엇보다도 이 악장을 통해 자유로움을 표현했다고 느꼈다. 느린템포, 중간템포, 빠른템포, 매우 빠른 템포, 긴 트릴, 그리고 그 이후에 나오는 이 곡의 마지막 고요속으로 가기전에 펼쳐지는 음악적 페시지는 왼손의 아르페지오 반주속에 오른손 주제를 변형시켜 자유롭게 표현했다. 특히 마지막 페이지의 높은 음역의 오른손 긴 트릴이 진행되는 가운데 멜로디가 레가토로 이어져야 하는 어려운 부분을 음악적 능력과 감수성으로 잘 표현해주었다(알리시아 데 라로차의 평).


이 날의 리사이틀은 약 70분간 쉬는 시간 없이, 박수 없이, 그리고 앵콜 없이 진행되었다. 32번의 마지막 코드가 울려퍼진 뒤 한참의 정적이 흐른 후 필자를 포함한 청중들은 모두 감동과 감사의 박수를 보냈다. 윤유진의 이 날의 연주는 우리 시대의 숙명적 난제들과 베토벤의 고통의 고요한 바다가운데 울려퍼진 아름다운 위로의 노래였다.

평론, 윤재겸(맨하탄 음대 박사, 현 클랑파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