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상 과학 소설과 순수 소설을 넘나드는 환상적이고 슬픈 러브 스토리
‘SF 여름 행성’, 이영훈 지음, 292p, 1만4800원
가까운 미래의 첨단 문명 속에서도 사랑에 눈이 멀고, 현재의 삶에 상처받는 이야기들을 엮은 SF 소설집이 출간됐다.
북랩은 우주 식민지, 아포칼립스, 다중 우주론을 다룬 미래와 실패한 인연에 얽매인 남루한 삶을 다룬 현재를 대비하면서 다채로운 사랑의 변주곡을 들려주는 소설집 ‘SF 여름 행성’을 펴냈다고 17일 밝혔다.
이 책은 4편의 SF 단편과 4편의 순수 단편으로 구성돼 있으며, ‘여름 행성’이 첫 번째 이야기로 등장한다. 냉동 수면 상태로 몇 년을 비행해야 도착할 수 있는 우주 식민지, 여름 행성에서 주인공들은 지구에 두고 온 사람들을 그리워하면서도 다시 새로운 사랑을 갈구한다. 소설에서 우주 방사능에 노출돼 돌연변이가 돼가는 사람들과 외계 행성의 신비로운 풍경들은 사랑의 불안전성과 마력을 상징한다. 특히 사랑의 불안전성은 모든 작품들을 관통하는 주제다.
핵전쟁 이후 독재자가 지배하는 지하 도시의 경비단장을 맡은 평범한 중년 남자가 정치적 탄압을 받게 된 여자를 구해주기 위해 안정된 삶을 포기하고 같이 지상으로 도망치지만, 여자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 유전자 조작으로 피부가 변한 돌연변이 여자에게 고백하는 이야기 ‘유리 여자’도 사랑의 불안전성을 보여준다.
기계를 사용해 사람의 의식을 다른 차원으로 이동 시켜 일 년간 생활하게 되는 이야기 ‘눈사람 나라’에서 주인공 늙은 남자는 첫사랑에 실패했던 스무 살 과거로 돌아가 완벽한 남자 친구가 돼주지만 뜻밖의 훼방꾼을 만나게 된다. 그 전에 늙은 남자는 공기업 퇴임 이후 다른 직장에 들어가지만 어린 상사의 폭언으로 스트레스가 심해지고, 끝내 설암으로 혀의 일부를 잘라내고 방사선 치료로 몸도 약해진다.
늙고 병든 몸이지만 의식은 건강하기 때문에 다른 차원의 건강한 나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이다. 여기서 방사선은 변할 수밖에 없는 사랑의 운명을 상징한다. 우주 방사능에 노출된 ‘여름 행성’의 주인공과 방사선에 노출된 ‘눈사람 나라’의 주인공은 결국 사랑의 방사선에 노출돼 상처받은 자들이다.
SF가 아닌 순수 단편들의 주인공들도 다르지 않다. 20년 전, 콩깍지가 씐 듯 사랑했던 여자의 장애를 알게 된 뒤 멀어졌던 주인공이 공허한 일상을 살다가 사랑의 상처를 가진 다른 여자를 만나게 되는 소설 ‘아라 이야기’도 사랑의 실패와 반복을 보여준다.
책의 마지막 작품이며 가장 짧은 단편인 ‘상수와 계희’는 앞선 작품들과 다른 시대 배경을 가졌지만, 운명처럼 만났다가 비극적으로 갈라진 남녀 운명이 강한 여운을 남긴다.
작가 이영훈은 어릴 때부터 우주여행에 대한 호기심으로 SF를 탐독했다. 밤하늘을 사랑하는 그는 태양계 탐사선 보이저와 뉴호라이즌호를 오랫동안 지켜보고 있다.